한석규 프로필(2) 1990년대 중, 후반 최고 전성기~하락세
프로필
영화배우, 탤런트
출생 1964. 11. 3. 서울특별시
소속사 클로버컴퍼니
가족 배우자 임명주
학력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 학사
수상 2016년 SAF 연기대상 대상
2011년 SBS 연기대상 대상
한석규 프로필
한석규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에서 1964년 11월 3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 한 씨, 신체 중 키는 178cm, 체중은 64kg, 혈액형은 AB형으로 신발 사이즈는 270mm이다.
한석규는 1998년 결혼하여 배우자 임명주와 2남 2녀를 두고 있다. 한석규의 학력사항은 서울숭례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용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학 학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한석규의 종교는 무종교(무신론), 병역은 대한민국 육군 제27보병사단 의병전역했다. 소속사는 클로버 컴퍼니로 데뷔는 1990년 KBS 성우극회 22기, 1991년 MBC 제20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한석규 KBS 성우 활동 ~ 1990년대 초반 MBC 공채 시절
한석규 프로필(1) 낭만닥터 김사부 3 한석규 KBS 성우 활동 ~ 1990년대 초반 MBC 공채 시절까지
프로필 한석규 영화배우, 탈런트 출생 1964. 11. 3. 서울특별시 소속사 클로버컴퍼니 가족 배우자 임명주 학력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 학사 수상 2016년 SAF 연기대상 대상 2011년 SBS 연기대상 대상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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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1990년대 중, 후반 최고 전성기
한석규는 한국 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하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한석규 덕분에 그동안 외면당하고 있었던 한국영화가 국민들의 관심을 되돌려놓게 되고 멀티플렉스에 보급과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크게 일으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때는 1950년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충무로의 질서가 해체되고, 영화계 외부에서 수혈된 새로운 인력들과 대기업과 금융권의 참여로 제작과 유통환경이 개선되면서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모두 한국 영화가 한 단계 도약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영화는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에서 문화 산업으로 환골탈태한다. 그리고 이 흐름의 최선두에 흥행과 비평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한석규가 있었다.
한석규는 드라마의 연속 성공으로 충무로에서도 한석규한테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10여 개의 시나리오가 한석규한테 전달되었다.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물인 닥터 봉을 영화 데뷔작으로 선택한 한석규는 홀아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당시 서울 관객 기준 406,443명을 동원, 1995년, 한국영화 관객수 1위를 기록하며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한석규는 이 영화로 그 해 춘사영화상 신인남우상과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면서 데뷔작 한편으로 90년대 중, 후반 흥행보증수표 한석규의 역사가 시작된 게 이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후에 뛰어난 진가를 발휘하였다.
한석규가 데뷔작을 가벼운 코미디로 선택한 까닭은 너무 심각한 주제보다 본인에게 맞는 장르로 무난하게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닥터봉'과 함께 출연을 검토했던 영화는 심혜진, 진희경이 출연하는 스릴러물 손톱이었다. 데뷔작 '닥터봉'의 대성공으로 한석규는 단숨에 충무로 최고의 흥행 배우로 떠오르면서 무려 40여 개의 시나리오가 그에게 몰린다.
한석규는 그다음 해인 1996년, 배우 박성미의 남편인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이자 CG 및 특수효과 OST가 화제로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린 한국 최고의 판타지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 출연하여 전국 관객 기준 185만 5천 명을 동원하며 확실한 관객 동원력과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넓히게 되지만, 캐릭터의 화제성은 다른 배우에게 모두 빼앗긴,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훗날 한국 영화 산업에 진출하게 되는 큰 발판이 되었다.
한석규, 1997년에는 한석규 전성기의 최고의 해라고 불릴 정도로 무려 세 작품에 출연하면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창동 감독의 전설적인 누아르 데뷔작 초록물고기 (서울 기준 203,655명), 조폭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최고의 블랙 코미디이자 조폭 코미디물에 가히 원조로 손꼽히는 넘버 3(서울 기준 307,617명),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채팅을 소재로 꽤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97년 최고의 멜로 영화이자, 멜로 영화 역사에 교본이 되면서 신세대형 멜로 스타일로 엄청난 열풍을 이끌면서 한국 멜로 영화 부흥기의 서막을 연 접속(서울 기준 804,993명)을 연달아 히트시켰으며, 누아르(초록물고기), 블랙코미디(넘버 3), 멜로(접속)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들면서, 역대급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과 동시에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
한석규는 서울의 달 이후 슬럼프를 겪고 있던 학교 선배 최민식과 초록물고기에서 같이 출연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송강호를 넘버 3에 출연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는 등 능력 있는 배우들을 밀어주기도 했다.
1998년에는 한석규가 출연한 최고의 작품이자 많은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멜로작품으로 손꼽히는 멜로 영화의 역대급 대걸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했다. 어찌 보면 뻔한 신파 멜로이지만 허진호 감독은 세련된 화법과 형식미로 신파조 멜로를 뛰어넘었다는 극찬을 받았고, 한석규의 연기력도 자연스럽게 잔잔한 일상을 표현하는 역대급 연기력에 많은 관객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큰 호평을 받았다. (네이버 영화 홍성진의 영화해설 인용) (서울 기준 452,930명) 참고로 한석규는 이 영화 OST 앨범에 들어가는 주제곡도 직접 불렀다. 여담으로 ost가 이 영화의 제목과 동일하며, 잔잔하고 큰 울림이 있는 주제곡으로 ost도 크게 호평을 받았다.
한석규는 다음 해인 1999년, 은행나무 침대 이후로 3년 만에 강제규 감독과 재회한 영화 쉬리로 전성기의 최정점과 티켓파워의 최정점을 찍는다. 남북한을 소재로 순 제작비 24억 원과 총 31억 원의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서 4년 만에 완성됐다.
한석규는 최초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겨냥하였고 각종 특수효과와 총격전 하드액션 등 많은 화제를 불러 모은 이 영화는 98년 재난영화 타이타닉이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 영화 관객 동원 1위의 기록을 깨면서 695만 관객을 동원, 110억 원의 수익을 올리는 기록을 남겼다.
한석규는 또한 1999년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의 신기록을 달성한 것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쉬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대작영화의 본격적인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석규는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세계 영화시장에서 한국 영화 진출의 가능성을 제시해주었고, 그리고 한석규는 이 영화 쉬리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최초의 한국배우가 된 것과 동시에 최초로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한 한국영화 쉬리를 1999년 필모그래피에 채워 넣었다.
여담으로 이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1993년에 개봉한 서편제가 유일했으나 이 영화 쉬리가 등장한 이후 서울에서 245만 관객을 기록하면서 이제는 서울에서 100만이 아닌 전국 695만 관객 동원을 성취한 쉬리로 인해 한국영화 흥행순위 판도는 큰 변화의 조짐을 예고하였고, 이 영화 덕분에 한국영화가 본격적인 성장을 하는 데 있어서 어마어마하게 기여를 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기록을 남겼다.
한석규 그리고 이 영화 쉬리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크게 일으키게 된 최초의 한국영화인 것과 동시에 한국영화계에 최초로 1990년대 한국영화 전체를 대표하는 압도적인 흥행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면서 한국 영화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결정적인 방향을 내세우게 되었다. 그야말로 20세기 한국영화의 대표작이자, 쉬리가 한국 영화 역사에 큰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이 영화를 본 관객과 평론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라는 식의 좋은 반응을 보이게 되면서, 이로서 한석규 필모그래피에 큰 대표작으로 남게 되었다.
한석규는 그 해 말,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심은하와 함께 미스터리 고어 스릴러물이자, 한국 스릴러물에 최고의 수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텔 미 썸딩에 출연했다. 전국 관객 기준으로 20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은 성공시켰으나, 앞뒤가 뚝뚝 끊기는 스토리와 영상이 너무 형편없었다. 다만 석연치 않은 결말이 나름 당대에는 충격적인 반전인지라 결말에 대한 입소문이 좋았다.
그리고 이 작품의 평가는 관객과 평론가들의 호불호가 꽤나 갈리면서 극과 극으로 나뉘었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보고 난 후, 이게 뭐야?라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평가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지만 1990년대 한국영화가 한참 도약하던 시기와 당시 한국영화 중 스릴러라는 장르가 상당히 귀한 시절을 감안하여서 당시 한국 스릴러물에 있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면서 도시적이고 섬세한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한석규가 출연한 이 영화는 한국 스릴러 영화 역사상 걸작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념비적인 수작으로 손꼽힌다고 봐도 충분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당시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들, 그리고 불친절하면서도 끝까지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가는 몰입의 힘도 상당하였다는 점, 나름 세기말에 상당히 흥미롭고도 최고의 반전을 탄생시켰다는 점, 등으로 볼 때 매력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스토리를 이 영화에 크게 뒷받침해 주면서 큰 화제가 되는 등 이 영화의 장점이자 핵심이다.
포스터에서 하드고어 스릴러라는 문구를 표방하고 있는데 하드고어는 잔인한 장면이 많이 연출된 것과 피 혹은 선혈이라는 뜻을 의미하고 주로 사지절단이나 피하고 선혈이 난무하는 호러 영화에 쓰이는 용어이다. 참고로 하드고어의 목표는 보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당시 한국영화 가운데 중 미술도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고 하드고어 스릴러라는 장르가 흔치 않았던 시절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다만 텔 미 썸딩 때문에 박하사탕 출연을 거절했다고 한다.
한석규는 1995년 닥터 봉을 시작으로 1996년 은행나무 침대, 1997년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1999년 쉬리와 텔 미 썸딩까지 8편 연속 대흥행을 기록하면서 1990년대 중, 후반 한국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다.
한석규는 그러나 1990년대 마지막 작품인 텔 미 썸딩을 끝으로 서서히 하락세를 타게 되었다. 전성기는 짧았으나, 그 장악력과 영향력은 한국 영화 역사상 길이 남을 정도로 전무후무한 수준. 현재의 탑배우들의 존재감을 오롯이 혼자 보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석규 하락세
한석규가 한때 하락세를 겪었던 원인은, 본인의 행실이 나빴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충무로 진출 이후 단 한 번도 실패작에 출연하지 않았고, 비평에서도 실패한 작품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1990년대 중, 후반은 독보적인 원탑이었다.
한석규는 1996년 ~ 1999년 씨네 21에서 조사한 '충무로 파워 50인'에서도 한석규는 최소 10위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최고 순위는 1998년에 조사한 2위. 웬만한 유명 제작자와 감독도 한석규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그가 영화계에 끼친 영향력은 2000년대 탑배우들 중에서도 전무후무할 정도로 엄청났다. 이때 대한민국의 모든 시나리오의 99%가 한석규에게 맨 먼저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시기 왕성한 활동을 했던 탑배우들보다 한석규에게 먼저 시나리오가 갔고, 그가 거절하면 다음 순서로 다른 배우들이 받아 보는 경향이 업계에서도 당연시 여겨졌다. 물론 배우가 시나리오를 선별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그 까다로움이 너무 지나친 것은 문제였다. 거기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CF에 전념하는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게 되자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하는 1998년부터 한석규 자체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의 사소한 행동마저 조금씩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한석규는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매니저를 맡은 친형 한선규 때문이었는데, 한석규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1차 검토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판단하는 역할만 했으면 좋으련만, 본인의 능력을 넘어선 영화 제작에까지 관여하다 보니 정작 한석규 본인이 하고 싶었던 작품은 시나리오 선별 작업에서 퇴짜를 놓거나 충무로 입성 초기 닥터봉이 크게 성공하여 수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올 무렵에는 사전에 한석규와 상의 없이 무조건 출연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출연 번복을 하거나 개런티가 적다며 퇴짜를 놓기도 했다. 이 당시 발매된 영화잡지와 각종 신문들에 실린 한석규 관련 기사들의 제목은 죄다 "어느 영화에 출연 확정" 이런 식이었다. 한석규에 대한 기자들의 평이 안 좋게 나온 시기가 1996년 무렵이라고 생각된다.
심지어 그동안 한석규가 벌어 준 돈 수십억 원으로 영화사를 차려서 제작까지 했으나 손익분기를 못 넘겨서 손실도 많았다. 1990년대 후반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에서 주최한 핸드프린팅 행사 제의도 단칼에 거절하는 등 오지라퍼 행동으로 한석규를 기피하는 제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한석규의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하락세가 되자, 빛을 못 보던 다른 배우들의 도약이 조금씩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굳이 한석규가 아니더라도 연기나 흥행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만한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한석규로서는 조금씩 설 자리를 잃게 된 셈이다.
다만 훗날의 한선규의 인터뷰를 들어본다면, 단순히 한선규가 혈연으로 한석규의 매니저를 맡아서 말아먹었다기엔 나름대로의 고충도 심했던 듯하다. 이미 드라마로도 커리어를 나타냈고, 닥터봉, 은행나무 침대를 이어 초록물고기에 캐스팅될 때도 매니지를 하는 송강호를 추천해 줘서 그의 커리어를 이어나갔고, 나름대로 소속 배우 관리도 잘했으나, 충무로 내에서는 이때까지도 "한석규가 영화 몇 편 찍었다고 무슨 배우냐? 쟤는 탤런트지."라고 영화판에서 은근히 깔보는 상황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작품을 흥행시키며 몸값이 올라가자 역으로 갑질하던 영화제작사들 속에서 을질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한석규의 계약에서 쉬리의 러닝개런티 역시도 한선규의 아이디어여서 수많은 돈을 받았다는 것을 들어보면, 마냥 형 때문에 커리어가 망가졌다고는 보기 힘들다.
한석규 활동: CF
연도 | 기업명 | 브랜드명 | 공동출연 |
2017-2022 | 한국인삼공사 | 정관장(천녹) | |
2015 | 한국야쿠르트 | 헬리코박터 윌 | |
2012-2013 | LS네트윅스 | 몽벨(아웃도어) | |
2012-2014 | 메리츠화재 | 메리츠화재(보험) | 조여정 |
2009-2010 | 한국증권금융 | 한국증권금융 | |
2010 | 던롭 코리아 | 젝시오(골프용품) | |
SK에너지 | 엔킉솔룩스 | ||
2006 | 삼성화재 | 올라이프(보험 | |
LG유플러스 | LG텔레콤 | 김주혁 | |
2005 | 교보생명 | 교보생명(보험 | |
2004-2007 | 기탄교육 | 기탄교육 | |
2002 | SK텔레콤 | IMT2000(통신) | |
SK텔레콤 | 모네타(통신) | 이요원, 비 | |
2000-2004 | LG전자 | 엑스켄버스 | |
1999-2003 | KEB 외환은행 | 외환은행 | |
1999 | SK텔레텍 | 스카이(휴대전화) | |
1998 | SK텔레콤 | 넷츠고(PC통신) | 강성연, 한고은 |
1998-2000 | 동서식품 | 맥심 | 황서중(1999년), 안성기-심은하(2000년) |
1998-2002 | SK텔레콤 | 스피드011 | 장진영(1998년), 황인영91999년) |
1998 | 한국화장품 | 파메스 | |
1997 | GS칼텍스 | 보너스카드 | |
1996 | 제일모직 | 갤럭시 | |
대우전자 | 대우입체냉장고 탱크2 | 유인촌 | |
LG텔레콤 | 시외전화 082 | ||
1994-1995 | 진로 | 하이트 | |
1994 | 쌍용제지 | 비바 | |
LG생활건강 | 죽염 | ||
1993 | 해태음료 | 썬키스트 훼미리주스 | 김혜수 |
1993-1997 | 선창산업(현 선앤엘) | 선우드가구 | |
1993 | 현대자동차 | 엑셀GS | |
삼성전자 | 그린컴퓨터 | ||
제일모직 | 빈폴 |
한석규 수상 내역
한석규 수상내역 보러가기 ☜☜☜♠
낭만닥터 김사부 3 방송 시간 몇 부작이지?
낭만닥터 김사부 3
SBS 드라마 금, 토요일 오후 10:00. 16부작. 2023.4.28.~
제작: 유인식, 강보승(연출), 강은경, 임혜민(극본)
소개: 지방의 초라한 돌담병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진짜 닥터' 이야기
낭만닥터 김사부 3 김사부 역 한석규
김사부 역(국내 유일 트리플 보드 외과의)
본명 부용주. 한때 신의 손이라 불리었던 자. 지금은 스스로를 낭만닥터라 칭하며 은둔생활을 즐기고 있는 진짜 괴짜 의사. 세상에서는 그를 김사부라 부른다 시골의 돌담병원이라는 곳에서 외과과장을 하고 있다. 한때는 외로이 돌담병원을 지켜왔으나,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돈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는 마인드에서 진정으로 환자를 위할 줄 아는 의사로 거듭난 서우진이 있고, 더 이상 울렁증에 수술방을 뛰쳐나가지 않는 차은재가 있다. 제자들, 동료들과 함께 권역외상센터의 꿈을 키워 온 김사부. 드디어 돌담병원에 권역외상센터를 짓게 된다. 깔끔한 외경에 최첨단 시설까지 갖춘 완벽한 외상센터. 하지만 제대로 문을 열지도 못하고 권역외상센터는 위태로운 운명을 맞게 되는데... 김사부는 그의 숙원이었던 돌담병원 권역외상센터를 설립할 수 있을까. 출처 : 공식홈
한석규 (탤런트, 영화배우) 1964.11.03 낭만닥터 김사부 3(2023),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2022), 낭만닥터 김사부 2(2020), WATCHER (왓쳐)(2019) 등
낭만닥터 김사부 3 : 4/28(금) 밤 10시 첫 방송
[1차 티저] "살린다" 한석규의 낭만이 다시 시작된다.
[3차 티저] "우리가 포기하는 순간, 사람들이 죽어요" 기적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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